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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공책봉관계의 불간섭 원칙과 1880년대 청의 속국화 명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
    카테고리 없음 2022. 1. 13. 19:23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1879년 7월 {조선의 내정·외교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조선을 청국의 영향권 아래에 둠으로써 청의 안보를 유지하자}는 정책을 건의하였다. 이에 광서제(光緖帝)는 대조선정책을 승인하는 유지(諭旨)를 내리면서 중국이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므로 이를 완곡하고 신중하게 처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청국은 조선에 서양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권고하면서도, [내치와 외교는 자주]라는 전통적 의미의 사대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국은 이러한 전통적 관계를 뛰어넘어 군사를 파견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납치하였다. 또 외교통상고문과 군사교관 파견을 통해 조선의 내·외정에 대한 통제를 꾀하는 등, 이른바 조선 속방화정책을 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전문에는 조선을 청국의 속국이라 명시하였고, 조선 정부에는 외교에 관한 일은 모두 청국에 문의하라고 강요했다. 또 군대를 서울에 상주시킨 가운데 재정고문 진수당(陳樹棠)은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구절을 넣은 방문(榜文)을 남대문에 내걸기도 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청국의 대 조선정책은 의례적이고 관념적인 속방관계를 실질적 속방관계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은정태(2009). "청일전쟁 전후 조선의 대청정책과 조청관계의 변화". 《청일전쟁기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전략》. pp. 87-88.

    일반적으로 1860년대 중반 이후 총리아문의 '속국자주론'¹과 이후 병인·신미양요 및 조일수호조규 체결 과정에서 보여준 청의 불간섭·불개입 노선을 두고 의례적이고 관념적인 전통적 사대관계로 평가하고, 1880년대 임오군란·갑신정변 이후 종주권 강화 정책을 근대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실질적' 관계로 평가하면서 그 이전과 크게 차별화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관점은 적절한 것일까? 1860년대 이래 총리아문의 '속국자주론'은 모든 '조공책봉관계'의 핵심적인 원칙이라는 것이 편만한 논리이지만 실상은 다르리라.

    먼저, 일반적으로 이상적 유가적 의례에 입각한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이 전통적 관계는 1880년대 실질적인 근대적 관계와 차별화되기 일수지만, 의례가 오로지 전근대적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실 돌이켜보면 이는 상식이다. 타국의 국가원수가 방문할 때 해당 국가의 국가원수는 그를 맞이하는 외교의례를 갖춘다는 점만 떠올리면 말이다. 즉, 근현대적인 외교 관계에서 의례와 의전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정부 관계자들이 결례를 저지르면 과할 정도로 논란이 되기도 하는 것은 굳이 예시까지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국에는 '의례적인 전통적 관계'와 '실질적인 근대적 관계'라는 인위적이고 임의적인 이분법적 접근은 부적절하다.

    '의례적인' 관계가 전근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과 더불어, 과거의 의례를 기초로 한 전통적인 관계가 과연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는지 살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명·청 제국은 몽골제국의 유산을 일부 계승하고 변용할 수 있었고, 따라서 제국 중심부 지근거리에 위치한 조선 왕조는 그들의 경성권력적 지배 이후 이를 보완하여 나타나는 '예'를 중심으로 한 연성권력의 구조적 지배를 수용해야 했다. 조선 왕조가 주권과 독립성을 부분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에 대한 사대를 제도적 수준으로 격상시키고 전략적인 외교를 펼쳐 그들에게 순복하여 중화질서의 '속국(屬國)'으로서 생존을 영위했기 때문이었다. 내정불간섭 원칙이라는 명제가 무색하게도, 명·청은 이 구조적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 직간접적인 개입을 시도하였고, 구조적 지배가 관철된 이후에도 황제의 사적인 욕구나, 제국의 내외부적 동인으로 인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²

    미시적인 사례를 들어보자면, 홍무연간 홍무제가 요동의 패권을 두고 이성계에게 표전과 책봉 그리고 혼사 문제를 통해 조선을 압박하였다. 때문에 반란이나 세자 교체로 인해 즉위할 수 있었던 태종과 세종은 사대외교에 심혈을 기울이며 이문을 구사하는 인재 양성과 그를 통하여 표전문 작성에 공을 들였다. 세조는 명의 내우외환과 명 사신들을 적절히 회유하고 활용함으로써 비교적 쉽게 책봉을 받을 수 있었지만, 명은 그를 여전히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문과 한문 학습을 위한 조선 유학생의 입국 요청을 거절했다. 성종대에 이르면 조선은 세조대의 견명사절 규모와 형식을 체계화하는 등 사대외교를 제도적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이제 조선은 명의 예제적 지배를 능동적으로 파악하여 신뢰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을 축출하고 즉위한 중종은, 신하의 반란에 의해 군주가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명으로 부터 인정받기 어려웠다. 정변 주도자들은 연산군의 칭병과 중종의 승습을 내세워 자신들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등 심혈을 기울여 겨우 책봉을 받아냈다. 중종은 가정제로부터 '내복(內服)'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내부적인 조고(詔誥)의 대상에 포함되는 것은 물론, 조선 지배층은 '중외(中外)'의 범주를 두고 예부에 유권해석을 품의할 정도로 파놉티콘적인 모습을 보였다. 명의 구조적 감시 권력이 백여 년 이상 지속하자, 조선은 속국으로서 그 권력을 내면화하고 그들의 규율을 자신에게 자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자발적 예속화'를 두고 조명관계가 관념적, 형식적 사대로 변모하였다는 다소 평화적이고 감상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이런 반현실주의적이고 지나친 구성주의적 해석은 조명관계의 안보 위기 상황 속에서 무너질 수 밖에 없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征明, 唐入り)를 명분으로 조선을 공격하고 주요 지역을 점령하자, 유보적 태도를 보였던 명은 조선과 의사소통 없이 대규모 파병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구원군을 표방한 명군은 조선에서의 작전권과 지휘권을 모두 독점하였고, 조선은 명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와중에 명군이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면서 '자위군'이나 '점령군'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빈번히 군량과 마초를 공급을 요구하거나, 강화 과정에서 송응창이 조선의 간신들을 선조 대신 손봐주겠다거나, 고양겸이 선조가 만력제에게 "조선도 일본의 조공을 원한다"는 상주를 올리도록 강요하는 등 내정에 개입하였다. 아울러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에서 조선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그 동향을 파악하기 어려웠으며, 명의 순무 파견이나, 조선의 분할 등의 소문만 들려올 뿐이었다. 조선은 결국 명 조정에 강화 중지를 직접 요청하며 그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선조는 명군 지휘부의 내정 간섭과 명 황제의 칙서 그리고 명군 지휘부의 강화 협상을 두고 13번 가까이 섭정과 선위 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광해군은 선조의 견제를 받아, 어느 때보다 그 권위가 강화된 명 황제의 세자책봉을 방해받았고, 이것이 명의 황태자 책봉이라는 자신들의 내부 문제 해결 및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과정과 맞물려, 장자 계승 원칙을 이유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은 다섯 차례나 거부됐다.

    전쟁 직후, 조선과 명군 지휘부의 차후 주둔 병력의 규모와 경비분담에 대한 협상이 결렬되면서, 선조나 명 조정이 기대했던 명군의 잔류는 무산되고, 명군의 철군이 결정되었다. 둔전청도 폐지되고, 임진전쟁기에 유입된 중국 상인들의 철수령도 떨어졌다. 그러나 전쟁을 거치며 강화된 경성권력적 지배는 곧바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1602년 3월 태감 고회가 조선에 위관들을 보내어 인삼 등 각종 토산물을 징색하고 중강개시를 강제로 존속시켜 징세함으로써, 조선에서도 변형된 형태의 '광세지폐'를 실현했다. 그는 게첩에서 '황명'을 내세우거나, 명 황제권의 구조적 권력을 상징하는 성지(聖旨)를 칭탁하였다. 조선으로서는 황명과 성지를 거부하기 어려웠기 사실상 제대로 된 대응이 불가능했다. 더불어 선조 말년부터 고천준 등 명 칙사들의 은 징색까지 더해지면서 조선이 채굴된 소규모 은과 대일 교역을 통해 확보한 은의 대부분은 칙사를 위한 뇌물로 소진돼버렸다. 때문에 조선의 은광 개발론은 모두 시들해졌고, 조정은 칙사 파견을 두려워하여 세자 책봉 주청까지 연기했다.

    한편 광해군의 세자 책봉은 끝내 실패했다. 조선이 명 제국의 예제적 지배질서에 강력하게 포섭되어 있는 이상, 명의 황태자 선정 문제는 임해군의 정치적 무력화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즉위한지 나흘 만에 국왕 책봉을 주청하였는데, 명은 책봉 주청을 거절하는 한편, 임해군의 거취와 그의 글 그리고 즉위가 신민의 뜻이 맞는지 다시 정확한 문서로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명은 전례 없는 조치로 아예 조사관을 꾸려 임해군을 대면했다. 다행히도 조선 측이 뇌물로 조사관들을 포섭하여 광해군이 책봉 받는 방향으로 명 조정의 의견이 굳혀지나, 광해군은 책봉 주청사가 압록강을 건너지도 않은 시점에 곧바로 임해군 제거 작업을 전광석화로 진행하여 종결냈다. 한편 조사관들 접대할 때 시작된 은 회뢰는 책봉사 유용에 이르러 통과의례화 되었다. 이후 1610년 세자 책봉, 1621년 천계제 즉위, 1622년 징병 요구 당시 파견된 명사에게 각각 수만 냥 이상의 은을 제공해야 했다.

    우리 나라의 물력(物力)이 이미 모문룡의 군대 식량 보급으로 바닥이 나서 아무리 애써 마련해보려 해도 별로 좋은 방책이 없습니다. 굳이 마련한다면 본주(本州)의 전결(田結)이 겨우 2천여 결이지만 국가에서 차라리 이 한 고을의 세입(歲入)을 손해보더라도 산성(山城)에다 소속시켜서 모든 전세(田稅)와 삼수량(三手粮)과 모병량(毛兵粮) 및 선혜청(宣惠廳)의 작미(作米)를 모두 본성에다 비축하도록 한다면 몇 년 뒤에는 자연 얼마간의 모양이 갖추어질 것입니다. 신들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仁祖大王實錄》 14권

    후금의 수립과 함께 광해군은 은밀한 친후금 노선을 펼쳐 명 질서의 균열을 보여주었으나, 임진전쟁을 거치며 명의 경·연성권력적 지배가 최고조에 이른 시점에서 능양군을 비롯한 불만 세력은 광해군을 '배명(背明)' 등을 명분으로 들어 폐위했다. 계해정변 이후 인조 정권은 직후 집권층은 국왕 책봉 주청사를 보내나, 명 신료들은 "황제의 승인 없이" 광해군을 폐위시켰다는 이유로 힐난했다. 어쨌든 인조정권은 대후금 공세라는 명분을 내세워 책봉을 받아낼 수는 있었지만, 명은 인조 책봉 조칙을 모문룡을 통해 알림으로써 조선의 전략적 협조를 유도했다. 인조는 명에게 동심협력을 할 것 표방했다. 그는 광해군은 끝까지 거부한 모문룡의 둔전 및 염전 요구를 허락하고, 도성 방어와 함께 '친정'까지 논의하면서 어영사(御營使)를 발족했다. 아울러 그 자체로 비윤리적인 후금과의 비밀 교섭을 아예 단절하였고, 행여나 후금이 교섭을 요구해오면 모문룡과 정보를 공유한다는 지침을 마련했다. 이와 함께 누르하치-광해군대의 여진인 쇄환도 모두 중단하고 포박한 여진인은 모문룡에게 넘겨버렸다.

    1637년 50여일 만에 조선으로 부터 항복을 받아낸 청은 조선에 대한 명의 종주권을 청산하고 조선의 대명외교를 제한했다. 이제 조선의 새로운 종주국으로 자리잡은 청은 일종의 전쟁 배상금의 성격을 띄는 막대한 세폐 조공, 심양관을 통한 간섭, 2차례의 심옥 등 경성권력적 지배를 시도했다. 이때까지는 단지 조선과 명확한 위계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 의례를 활용하는 등 연성권력적 지배에 있어서는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강희연간에 이르러 청은 예제적 지배질서를 정비하여 명의 구제와 같이 구조적 지배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1690년대, 세폐의 극적인 감면, 사문사의 파견이 중단, 사문 자체도 감소했다. 그 결과 조선국왕에 대한 벌은은 책정될지언정 더이상 실제로 부과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제 정비의 일환에서, 명분이 취약한 장희빈의 아들 이윤(경종)의 세자 책봉 주청을, "왕과 그 비가 오십이 될 때까지 적자가 없어야 비로소 서장자를 왕세자로 세울 수 있다(王與妃五 十無嫡子 始立庶長子爲王世子)"는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조문을 들어 거절했다. 경종 즉위 이후에도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을 두고, 청사는 청 황제권을 이용하여 영조와 종친 등을 대면하고 이들의 인적 사항을 자세하게 이용하는 등 국내 정치 상황에 개입할 의지를 보였으며, 노론은 청 황제의 책봉권을 이용하여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고 연잉군을 왕세제로 옹립했다.

    영조가 즉위한 이후에도 《명사》의 하사를 둘러싸고 청에 주청사를 지속적으로 파견해야 했고, 중기에는 심양의 장수가 역관이 누차 은을 잃어버린 것을 두고 대국을 속인다며 동지사의 당상과 역관을 구류하는 사태, 후기에는 개인 사서에 대한 종계 변무를 마무리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영조는 이러한 치적을 대대적으로 알리면서 그 과정에 내왕하였던 외교문서를 《신묘중광록(辛卯重光錄)》으로 묶어 반포했다. 정조 즉위과정에서도 홍인한 등의 반발과 진압 과정에서 역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청에 보고했으나, 청은 주문의 내용이 아닌 위식(違式)을 문제삼았다. 정조는 청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소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이 문제의 처리를 위해 각별히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절대 황제권의 정국과 건륭제시대 정치적 현황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은 위식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 의도적이지 않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위식 문제 이후 조선 조정이 대청 외교에서 상당히 긴장하고 조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인조 이후의 외교문서를 집대성하는 《동문휘고》 편찬을 감행함으로써 그간의 외교 사안을 점검하고 청과의 외교적 마찰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이는 사실상 청의 감시 권력의 구조적 작동이 성공했음을 반증한다.


    제국의 대변인이자 충실한 대내외 정책 집행자이자 정책의 기획자였던 이홍장.


    이상으로 명·청과 조선의 관계에 있어서 '예'라는 관념과 '의례'라는 형식은 곧 경·연성권력적 지배를 작동케하는 수단이었음을 확인했다. 명·청 제국은 조선에 대하여 통시적으로 제국의 지배권을 직간접적으로 행사했고, 안보 위기 상황에서는 경성권력적인 지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실상이 이렇다면 상술했듯이 1880년대 청의 이른바 '종주권 강화'라는 명제는 의례(허례)에서 실질적 관계로의 극적인 변모(속국화)로 이해할 수는 없다. 1876년 초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자, 이홍장은 "조선은 빈약하여 그 세력이 일본에 미치지 못하는데, 장차 이 나라가 전명의 고사를 들어 대방(大邦)에게 도움을 구하면 우리는 어떻게 응할 것인가.(度朝鮮貧弱 其勢不足以敵日本 將來該國或援前明故事求救大邦 我將何以應之)"라고 우려했다. 곧이어 그는 조선에 일본과 협상을 권고하는 소식을 보낼 것을 총리아문에 촉구했다. 그리고 이유원에게도 비공식적인 서신을 보내어 동일한 의견을 전달했다. 한편으로는 일본이 조선을 침공할 경우 청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청일수호조규 제1조에 "소속방토(所屬邦土)는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라는 조문의 위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홍장의 행적은 청의 불개입 노선이 조공책봉관계의 원칙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현실적으로 물리적인 개입을 피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882년 청 제국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발빠르게 조선으로의 출병을 결정했다. 대원군은 권력을 회복한지 한 달만에 실각한 채 제국으로 압송되었다. 이는 기존의 불개입과 권고 수준의 노선에서 극적인 변화였는데, 일반적으로 이 사건 이래 청의 적극적인 개입을 과거와의 단절 그리고 근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과거 이홍장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개입은 300여 년전 임진전쟁 당시 명군의 파병에서 그 전례를 찾을 수 있었다. 마건충은 대원군에게 황제의 책봉을 받은 국왕을 핍박한 혐의를 씌었으며, 이홍장은 대원군을 보정에 유폐시키면서 원대에 충선왕과 충혜왕을 변방에 유폐시킨 것을 근거로 삼아 광서제의 윤허를 받았다. 반면 마건충, 오장경(吳長慶), 정여창(丁汝昌) 등은 대원군의 압송은 어디까지나 조사를 위한 것일 뿐, 고려의 충선왕과 충혜왕이 잡혀간 전례(前例)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황제의 높고 깊은 뜻을 저버리는 것이라며 동요하지 말라고 효유하였다. 이러한 행적은 청국의 이해 당사자들간 이해차를 차치하더라도, 그들의 적극적인 개입은 단지 서구의 국제 질서에서 찾은 새로운 방식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에서도 찾거나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년 이래 중국과 외국의 여론 중에 그 나라의 자치권을 회수하자는 말이 있고, 원 때 감국(監國)했던 사례를 본받아 두등공사(頭等公使)를 파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李鴻章全集》 34.
    원 때 여러 차례 감국(監國)을 파견하였으나 그 직권이 일치하지 않았고 분란이 익히 일어났습니다. 만약 조정과 왕을 폐하고 이를 고쳐 행성(行省)으로 삼는다면 거동이 기이하고 독특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날은 각국이 이미 더불어 조약에 임하여 통상하고 있는데 러시아와 일본이 그 틈을 엿보아 필히 어지러운 일이 일어나는 틈을 탈 것이니 반란을 다스리고자 하여도 사세(事勢)가 아마 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李鴻章全集》 33.


    당시 조선을 군현화하거나 감국하자는 주장들은 표면적으로 서주시대나 한·원대의 사례를 인용하였는데, 그 내용은 사실 서구 열강이 타국을 병합하거나 식민화할 때 주재관을 파견하여 해당 국가의 내정과 외교를 통제하자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즉, 중국적인 사례와 표현으로 윤색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서구의 사례는 중국의 전례들과 보편성이란 측면에서 유사할 여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유권 해석이었다. 청말 서구의 종속 관계와 중국의 종속 관계들 사이에 가상적 등가관계를 설정한 사례를 무비판적으로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등공사, 조선통상대신(朝鮮通商大臣), 주차판사대신(駐箚辦事大臣), 감국대신(監國大臣) 등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외정에 개입하자는 주장들은, 세계관을 달리하는 서구의 사례들과, 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전례에서 각각 인용한 것이었지만 보편성이란 측면에서 유사한 것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과거 명 제국의 임진전쟁에 개입하여 조선을 배제한 채 일본의 조공 및 히데요시의 국왕 책봉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한 강화 협상을 주도한 실례, 원대의 다루가치와 같이 한인 순무를 파견하여 정동행성과 같은 기관을 설치하자는 명 조정에서의 논의, 후금의 발호와 함께 제기된 조선에 대한 '감호론' 등은 사실 청말에 유럽식 종속 관계를 중국적인 표현으로 비교·윤색하고 모방하자는 주장들과 본질적으로 상통한다. 하지만 청 조정은 위와 같은 주장들을 수렴하거나 공식적으로 논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주장들에 반박했고, 영국령 인도 봉신국(Indian Vassal States of Great Britain)이나 이집트 및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베트남의 사례와 조선을 차별화하며 조선의 '주권(sovereign)'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종주권을 관철하고자 했다.

    지금까지의 검토를 통해, 1880년대 이전까지의 명·청 제국과 조선 사이의 군신관계는 '예'라는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조공책봉관계라는 '의례'를 통해 실질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1880년대 이후 청 제국의 적극적인 개입은 서구 제국주의 도래를 계기로 근대성이 나타났다는 점³에서 그 이전과 큰 차이를 지니지만, 학술적으로 '종주권'으로 정의할 수 있는 조선의 주권 상위에서 작동한 권위 내지 권력, 즉 제국의 지배 질서는 이미 명청대에 걸쳐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 조정으로부터 대체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청 지식인들이 유럽식 속국체제에서 모방해 제기한 종속성 강화의 방식들도 서구의 근대성과 별개로 중국 역사의 전례에서 찾을 수 있었다. 따라서 1880년대 청 제국의 적극적인 개입은, 그 방식이 근대적이냐 전통적이냐 논쟁과 별개로 '종속성'의 강화 내지 심화일 뿐이다. 따라서 이 시기 청 제국의 대조선 정책을 '속국화'라는 명제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속국화'라는 명제는, 그 이전까지 제국의 지배 질서가 실제로 작동하지 않은 채, 그 관계가 이상적이고 평화적인 의례에 머물렀다는 전제하에 조선이 '속국'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따라 도출된 명제이기 때문이다. 비록 제국의 입안자들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법적으로 재해석·변용하고자 했으나, 그 이전까지의 관계도 실질적인 종속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는 이상, 19세기 후반까지의 양자의 관계를 굳이 '종주-속국' 관계로, 조선의 지위를 '조공국(tributary state)'과 함께 그 동가적 개념인 '종속국(Dependency)', '자치(autonomy)', '속국(Vassal State)' 등으로 정의하고 거론하는 데 무리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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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른바 '속국자주론'은 어디까지나 조선이 열강과의 통상 거부를 고수하자 총리아문이 서양인들의 조선 여행 요구를 저지하기 위해 "조선은 비록 속국이지만 정삭(正朔)을 받들고 때마다 조공을 해왔을 뿐", "일체의 정교금령(政敎禁令)은 그 국왕이 자주(自主)한다"라고 선언한 것을 두고, 북경의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Bellonet)가 조선은 조공국이긴 하지만 그 국정에 있어서는 자주할 수 있다고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청 제국은 조선이 명목상 속국(vassal state) 또는 조공국(tributary state)에 해당하지만, 실은 자주(sovereign) 독립(independent) 상태라고 해석할 수 있는 국제법적 프레임에 휘말린 것일 뿐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동욱(2020). "1840-1860년대 청조의 ‘속국’ 문제에 대한 대응". 《中國近現代史硏究》 86. 참조. 따라서 총리아문이 서양인들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임기응변적으로 내놓은 언설을 명·청 제국과 조선의 관계를 관통하는, 더 나아가 '조공책봉관계'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으로 소급하는 것은 몰역사적이다.

    2). 조선이 영락제와 선덕제라는 두 호걸 황제의 개인적인 기호를 맞추느라 치른 대단한 곤혹에 대해서는 정동훈(2020). "正統帝의 등극과 조선-명 관계의 큰 변화 - 조선 세종대 양국 관계 안정화의 한 배경 -". 《한국문화》 50. 참조.

    3). 동삼성에 철로를 건설한다거나, 조선 해관의 세무사를 중국에서 파원한다거나, 조선이 외채를 빌리는 것을 저지하여 자국의 권익을 보전한다는 등의 근대 제국주의적 수단들이 대표적이다. 당시 조선은 북양함대가 황해를 영해화함으로써 교역망의 안전을 제공받거나 해관을 정비받았으며, 더 나아가 그것들을 통해 해관세를 거두어 재정을 충당하는 등 종속성이 심화된 바 있다. 그 외에도 청 제국은 육로 전신선을 가설하고 통제하고자 함으로써 조선을 국제 네트워크에 연결하는 데 앞장섰다. 청말 대조선 정책이 근대적인지 전통적인지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 참조. https://chinua.tistory.com/15

    4)
    . 청 양무파 외교관들이 '상상'한 서양의 종속 관계와 그들과 더불어 청 조정과 북양대신 등이 그러한 종속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조선 정책에 반영했는지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 참조. https://chinua.tistory.com/19

    근대 초기, 동양적 맥락에서의 '종속국'과 '식민지' 그리고 '자주 독립'에 관하여 -시암과 청 제국

    동아시아에서는 조선을 '속국(Vassal State)' 또는 '종속국(Dependent State)'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 한국에서는 모종의 역사적 맥락에 따라 그런 통념이 아주 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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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오스만 제국과 그 종속 지역 간의 관계를 지칭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종주권', '종주국' 등의 개념은, 명·청과 조선이 각기 별개의 국가였다는 점에 따라 내외정이 모호한 오스만 제국과 그 종속 지역들의 관계보다 더 부합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 참조. https://chinua.tistory.com/13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을까? - 종주권과 속국 그리고 조공국 등 개념사를 중심으로 -

    속국은 전근대 자료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며, 노태돈·정병준도 전근대의 속국과 근대의 속국 개념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즉 현대에서 속국이라 하면 종속국이나 비자주적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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